블루문 맥주. 드물게 뜨기 때문에 블루문이다.

“저기.. 우리 만나봐도 괜찮을 것 같아” 

메뉴판을 읽어보던 중에 테이블 반대편에서 나온 그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내가 말을 잘못 들었나? 오늘은 이런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 놀란 표정이었다. 멋쩍은 웃음으로 나를 쳐다보았으니 말이다.


내 인생의 첫 소개팅에서 나는 지각을 했다. 

대충 알아본 역 주변 카페에서 보자고 약속을 잡고 소개팅 당일에는 상대방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하철이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미안합니다”라고 보냈지만 사실 소개팅 전에 다른 약속이 있어서 늦었을 뿐이었다. 지하철이 멈춰섰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과연 그걸 믿었을까?

도착한 카페는 사람들이 많았다. 너무나도 시끄러웠고 대화를 이어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시끄러웠다. 환기를 위해서인지 열어둔 창문에서는 간간히 자동차의 크락션 소리까지 들려왔다. 주말이라 해도 이렇게 정신이 없는 카페라니. 소개팅으로 고르기에는 최악의 장소였다. 역에서 가깝다는 것만 온라인에서 대충 찍어 선택한 나의 잘못이었다. 이런..

30분이나 늦은 나는 어색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등 소개팅에서의 뻔한 대화를 했다. 지금생각하면 뭔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적어도 대화가 끊기지는 않았고 우리는 밥과 술까지 마시고 헤어졌다.

엉망인 소개팅이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녀도 인생 첫 소개팅이었기에 정신이 없었던것 같다. 엉망인건 기억해도 다행이 긴장하고 어색한 자신의 모습이 더 컸던 것 같다. 다행이었다.

그 후에 그녀와 두세 번을 더 만났다. 의례 소개팅은 두 번 정도 더 만나는 것이 예의라는 친구들의 가이드를 철썩같이 믿었기에 별 감정 없이 에프터를 보냈고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나중에 사귀고 나서 알았지만 그녀는 그냥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녀도 딱히 별로 나에게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렇게 두세 번을 만나고 나서 왕성한 혈기의 나는 그녀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데이트 이후 집에 가던 버스 안에서 “우리 더 만나보는 건 어떻겠냐”고 이야기를 던졌다. 그리고 나의 고백을 듣고는 한참을 조용히 생각하다가 그녀와 나의 집 중간 사이의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차 지나가는 소리와 매미 소리만 가득했던 여름밤이었다. 그녀가 나를 배려하여 일부러 조용한 곳을 골랐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아마 좋은 결론은 아니겠구나 라고 생각했고 한참을 조용히 뜸을 들이던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미안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확실한 거절 의사를 들었지만 우리는 그 후에도 한 번 더 만나게 되었다. 두 번째 데이트에 비가 왔었는데 당시에 우산이 없던 그녀에게 억지로 우산을 쥐여준 적이 있었다. 그 우산을 받기 위함이었고 마지막으로 밥을 먹기 위해 햄버거 집에 들러 메뉴를 고르던 나에게 그녀가 말했다.

“우리 만나봐도 좋을것 같다” 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야기에 놀랐고 내심 그녀도 놀랐던 것 같다. 나중에 그녀가 이야기해준 사실은 원래는 그냥 우산만 주고 헤어지려고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밥을 먹자는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고 햄버거 메뉴를 보고 찬찬히 읽고 있는 나를 보고 그냥 이야기가 툭 하고 나왔다고 했다. 그녀 역시 아무런 기대와 준비도 없이.


인생에 있어 갑작스럽게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마주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망한 줄 았았던 시험결과를 받아봤을 때, 떨어진줄 알았던 회사 면접에서 합격했을 때, 그리고 위 이야기처럼 내 첫 소개팅도 그랬다. 

어느정도 나이가 들면 일상의 이벤트들은 보통은 예상을 벗어나질 않는다. 그만큼 시간은 일정부분의 예지력도 우리에게 심어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가끔 “블루문” 처럼 예상을 벗어나는 일은 발생하고 우리는 그것을 기대하며 살아간다. 그래야 인생이 재미있으니까.

오렌지 껍질로 맛과 향을 내는 맥주에 왜 블루문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오렌지문이라고 만들면 좋은거 아닌가 ? 아니 애초에 블루문도 파란색을 뜻하는건 아니다.

블루문의 로고 색상을 보면 반고흐의 그림이 떠올라진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다보면 왜 블루문의 제작자들이 맥주 이름을 “블루문” 이라고 지었는지는 알것 같다.

아.. 예상치 못한것을 표현하고 싶었구나


처음 블루문의 맛을 본 친구가 맥주의 맛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비누맛” 이라고

비누를 먹어본적이 있나? 라는 궁금증은 차치하더라도 나 스스로도 그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을 보면 블루문은 확실히 비누맛이난다. 그 예상치 못한 오묘한 맛을 표현하기에는 비누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물론 실제 비누를 블루문에 넣었을리는 없고 블루문의 맛은 오렌지와 고수의 향이 기반이다.  누군가는 

“상큼한 오렌지의 향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넘어온다” 

라고 멋들어진 표현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10년간 블루문을 마셔오며 단 한 번도 멋들어진 감상평을 생각하거나 만들어 보지 못했다. 나에게 있어 블루문은 언제 마셔도 느껴지는 특유의 예상치 못한 오묘한 맛이 중심이다. 이상하게도 10년간 블루문을 마셔왔지만 지금도 정확히 이게 무슨 맛인지 알수가 없고, 매번 마실때마다 예상하지 못한 맛으로 느껴진다.

맥주가 너무나도 땡기는 날, 첫잔을 들이키는 “맛있는 한 잔”이 절실히 필요할 때면 나는 블루문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부분 만족한다. 매번 그 맛을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첫 모금이 입안에 들어올때의 신비로움과 즐거움이 아직도 가득하다.

다만 블루문의 문제는 언제나 뒷끝이다. 아쉽지만 블루문은 첫 모금의 그 “이해할 수 없고 예상할수 없는 신비로운 맛”를 꾸준히 이어가지 못한다. 

블루문은 첫 모금 이후에 맛이 수직 하락한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할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블루문을 세 병/캔 이상 산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이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오래 마시지 못하는 맥주니까.


블루문의 맛있음에 끈기가 없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맛 자체보다는 예상하지 못하는 특이하다는 특징이 결국에는 “오래가지 않기” 때문이다. 블루문은 매번 첫 모금의 신선함과 새로움이 매력적인 맥주지만, 그렇기에 그 매력이 반복될수록 점차 색이 바래진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일어난 작은 놀라움과 기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무뎌지는 것과 사실 비슷하다.

위에 이야기한 나와 그녀는 결국 끝이 좋진 않았다. 여느 연인들처럼 초반에는 불같이 타올랐지만 금세 타오르던 불길은 익숙함으로 조금씩 식어갔다. 그녀도 나의 모습에 익숙해지며 실망을 쌓아갔고 나 역시도 똑같았다. 우리는 많이 싸웠고 결국 그렇게 뻔하게 헤어졌다.

그녀와의 이별은 힘들었지만 결국 나는 다시 열심히 소개팅을 하며 새로운 사람을 찾아다녔다.  새로운 만남을 기대했고 그 선택은 매번 즐거움으로 가득했지만 결국에는 다시 실망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시작했다. 마치 뒷끝에 실망하는 블루문을 매번 다시 찾는것처럼. 

블루문은 나에게 항상 예상치 못했던 신선함과 독특함을 떠올리게 한다. 첫 잔의 설렘 그리고 언제나 그 후에 다가오는 익숙함으로 인한 실망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계속해서 다시 찾게 되는 이상한 매력이 있는 맥주다.

블루문을 마실 때마다, 그 신선함과 실망감을 함께 기억한다. 그 끝을 알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맛있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 편의점에서 블루문을 집는다. 그렇게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