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버번

여름은 위스키와 썩 잘 어울리는 날씨가 아니다. 아무리 위스키를 좋아하는 나라도 무더위의 여름날에 떠오르는 건 차가운 냉장고에서 갖 꺼낸 차가운 맥주 한잔이지 위스키가 아니다. 아무리 위스키 열풍이 불고 여름에도 즐길 수 있는 시원한 하이볼 문화가 생겨나고 있다고 해도 30~40년간 이 맥주 업계에서 뿌려온 여름의 시원한 맥주 한잔의 이미지를 이겨내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하이볼은 너무 만들기 귀찮단 말이지..

그럼에도 나는 여름이면 꼭 버번을 자주 마시는데, 특히 스카치가 아닌 일부러 버번을 찾아 마시는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다. 버번이 여름에 잘 맞는것도 아니고 추천할 생각도 없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이 글의 제목을 보고 ‘어 여름에는 버번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틀렸다. 그냥 나라는 사람이 경험한 한 조각의 이야기가 여름에는 버번이 참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을 뿐이다.

가끔 이런것들이 있다. 누구도 이해 하지 못하지만 그냥 나만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인해 좋아지는 ‘그 무언가’ 말이다. 자세히 설명해줘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의 표정을 보게 되는 ‘그것’ . 어찌보면 나이가 들수록 개인이 경험한 이야기가 모여 현재의 나를 만드는 것이니 내가 느끼는 것을 다른 3자가 이해할 것이라는게 더 자연스럽지 못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30대 초반쯤 나에게 생긴 취미 중 하나는 금요일 저녁에 꼭 영화를 한 편 보고 잠을 자는 것이다. 정확한 영화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어느날 한 영화를 보고 감동했던 것이 계기였다. “세상에 이렇게 인간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드는 감동적인 엔터테인먼트가 있는데 이걸 마음껏 보지 않으면 나중에 아쉬울 것 같다” 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하여튼 그렇게 시작한 내 나름의 리추얼(습관)이 바로 금요일에 영화 한 편 보기였다. 아무래도 한 주가 끝나고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은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영화 한 편 보고 새벽늦게 자도 다음날 편하니까.

당시 나는 성수동에 있는 쉐어하우스에 살고 있었는데, 디웰이라는 그 쉐어하우스는 사람들도 좋고 환경도 좋아서 내 인생의 좋은 기억과 흔적을 남겨준 곳이지만 그럼에도 단 한 가지 단점을 꼽자면 각 방마다 에어컨이 없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물론 거실에는 에어컨이 있었기에 여름에는 다들 문을 열어두고 살았고 그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볼 때 누군가가 나의 방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는 것조차 싫어서 문을 닫고 선풍기를 켜두고 있었는데 시원하지 않더라도 그만큼 나만의 시간이 좋았던 것 같다.
영화를 볼 때면 항상 내 옆에는 맥주 혹은 위스키가 있었는데, 여름날이었기에 맥주를 마시고 싶었으나 막상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볼 생각을 하면 귀찮음이 몰려올 때가 많았다. 나가서 맥주를 사기까지 대략 10분.. 아 너무 귀찮은 일이다. 냉장고를 열어 옆방 친구의 맥주를 마셔버릴까 했으나 그것도 내키지 않아서 결국 위스키를 마시게 되었는데, 버번이었던 메이커스 마크를 얼음과 함께 온더락 잔에 따라놓고 영화를 시청했다.

당시 영화 이름도 기억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나도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영화였으나 사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이 영화 제목을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에 내가 맡았던 위스키, 즉 메이커스 마크의 향 때문이다.


버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버번 특유의 달달한 옥수수 향을 잘 알것이다. 물론 이게 정말 옥수수 향인지는 나도 모른다. 옥수수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옥수수 특유의 향을 특정하기에는 그 식품에 대한 경험이 매우 적다. 아마 그냥 버번 자체의 향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버번이 옥수수로 만들어지니 그게 그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선풍기는 90도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영화를 보는 나에게 잔잔하게 바람을 불어넣어주고 있었고, 그 바람의 길목에 자리 잡은 메이커스 마크의 향이 선선하게 불어왔다. 처음에는 가볍게 ‘버번 향이 좋구만’ 정도였지만 점차 향이 깊어졌다. 아무래도 위스키의 향이 바람을 타고 온 방을 계속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위스키 향으로 이루어진 바람길이 내 방에 천천히 돌고 있었고, 나는 그 한가운데 앉아 좋은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정 시간이 지났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기분이 묘했다. 향에 취한다는것이 이런걸까? 아마 그때 누구든 영화를 보고 있는 나의 방 문을 열었다면 내가 느꼈던 좋았던 향을 바로 맡았을 것이다.

당시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는 위스키 향을 좋아하던 사람이 없었다. 2018~19에는 아직 위스키 붐이 불기 전이였고 그들에게 있어 위스키는 ‘어른들이 마시는 양주’라는 이미지였다. 내가 언제나 ‘이 위스키 향 좋지 않아?’ 하며 위스키 뚜껑을 열어서 맡게 해주거나 함께 술을 마실 때 잔을 건네주면, 코로 한 번 맡고는 ‘음… 그렇네…’라는 대답뿐이었다. 물론 세상 모든 개인적 취향이라는 것이 남들이 공감하거나 강요할 수 없는 것임을 알지만 조금은 아쉬운 대답들이었다. 그런 그들이라도 그 당시에 내 방에 들어왔다면 적어도 ‘어우, 얼마나 술을 마신 거야?’가 아닌 ‘오.. 이 좋은 향은 뭐야?’라는 질문을 분명히 던졌을 것이라 확신한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러게? 이 좋은 향은 도대체 뭐지?’

내가 진작에 경험하던 버번의 향은 아니었다. 다양한 버번을 여러 병 비워왔지만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향은 처음이었다. 무언가 달랐다. 여름밤 끈적한 공기 안에서 어둑어둑해진 방안의 분위기와 함께 묻어나오는 특유의 향이 있었다. 적당한 습도 때문이었을까? 선풍기 바람이 완벽한 바람 세기였나? 아니면 그냥 그때의 내 마음의 차이였을까? 알수 없다.

그런 환경에서 영화를 보며 난 기분이 매우 좋았다. 물론 영화 자체도 좋았겠지만, 선선하게 내 주변을 돌고 있는 버번(메이커스 마크)의 향이 분명 그 경험을 한 단계 올려주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화가 좋았다 정도가 내 기억 속에 남아있어도, 당최 영화의 무슨 내용이 좋았던 것인지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영화가 좋았던 걸까? 아니면 그때의 향에 취한 내가 좋았던 상태였을까?

사람들이 왜 향수에 돈을 쓰는지 알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향이라는 건 사람에게 흔적을 남기기도 하는구나.


그날 이후 여름밤에 되면 가끔 비슷한 방법으로 버번을 따라놓고 선풍기를 통해 그때의 기분을 재현해보려고 노력한다. 물론 잘 되진 않는다. 조금은 비슷하게 만들 수 있더라도 그때의 느낌은 없다. 아무래도 무엇이던지 강렬했던 첫 경험을 다시 만들어 내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일 것일텐데 아쉬우면서도 그러려니 하면서도 계속 시도는 해보는 중이다.

나이가 들면 쓰잘대기 없는 성향들이 생기는데, 위의 경험들로 인해 나에게 있어서는 여름에는 버번을 마신다 라는 쓰잘대기 없는 성향이 생겼다. 그것도 선풍기를 틀어놓고 마시는 특이한..

그래서 나에게 여름은 버번을 마시는 계절이다. 언젠가 누군가 나와 함께 한다면 왜 여름에 버번을 마셔? 라며 물어볼 것이고 나는 분명 나의 경험을 설명해 줄 것이다. ‘그 당시 여름밤에 선풍기 바람과 함께하는 버번향이 너무 좋았었어!’ 라고..